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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계속된다

<스크랩> 야구장 전광판 가이드

by 독청64 2011.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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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 전광판 가이드

영국인 탐정 셜록 홈스가 한국 목동야구장을 찾았다. 한국에 숫자와 알파벳 등 암호가 난무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구조물에 대해 외계 생명체가 보내는 메시지라는 주장부터 플라톤이 언급한 아틀란티스의 후예들이 만든 것이라는 설까지 별의별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추리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가 모르는 체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서 목동야구장에 도착한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이상한 스포츠였다. 크리켓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스포츠. 얼리 어댑터답게 홈스는 흥미를 갖고 그라운드를 쳐다본다. 그러나 그것도 10여 분. 그의 입에서는 하품이 연방 나오기 시작한다. 씨름 선수와 같은 이가 한쪽에서 미친 듯이 발레를 하고 구조물 근처의 삐쩍 마른 육상 선수와 같은 이가 지그재그로 뛰어다닐 뿐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어느 소설가는 야구를 우아하고 감성적이라고 말했지만 처음 경험한 이에게는 끔찍한 악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드렁해진 그의 눈은 본래 목적인 거대한 구조물을 향한다. 구조물에는 세간의 말처럼 숫자와 알파벳 등이 뒤죽박죽 섞여 배열되어 있다. 모든 기호는 의미가 있는 법. 일단 홈스는 전광판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구조물을 이틀에 걸쳐 연구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첫째 날. 야구는 9이닝의 경기

야구장 전광판만 잘 활용해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대략적인 경기 과정과 라인업, 수비위치, 그리고 현재 상황 등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사진: 야구라>

 

 

홈스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팀 이름 앞에 불이 번갈아서 들어온다는 점이다. 동시에 들어올 때가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불이 들어온 팀의 타자가 배트를 들고 타석에 들어서고 상대 팀은 수비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거기에 사람들이 각 팀이 한 번씩 수비와 공격을 하는 것을 회(이닝)라고 부르며 선공을 초, 후공을 말이라고 하는 것도 알게 된다. 그는 아르키메데스라도 된 듯이 외친다. ‘유레카!’

 

얼마 지나지 않아 홈스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다. 숫자 아래에 숫자가 시간적 간격은 있지만 하나씩 생겨나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게다가 필드 위에 타자가 다이아몬드를 돌아서 다시 홈 플레이트를 밟으면 1로 변한다는 것을. 타자주자 한 명이 들어올 때마다 정확하게 1이 더해진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두 자릿수는 어떻게 표시하는 것일까?’ 때마침 한 팀이 한 이닝에 10점을 올리자 숫자 9가 A로 변화한다. 10점이 A이면, 11점은 B, 12점은 C… 이렇게 된다는 것은 홈스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추리할 수 있을 터.

 

그리고 각 이닝의 점수가 더해진 것이 R 아래 숫자와 일치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즉, R은 득점(Runs)의 영문 첫머리 글자이다. H는 안타(Safe Hit)를 나타내며, E는 실책(Error), B는 볼넷(Base on balls)을 가리킨다는 것도 알게 된다. 신이 난 홈스는 여성 4인조 친절한 밴드의 ‘나는 천재다’를 흥얼거린다. “나는 천재다. 난 그렇게 믿고 있다.”

 

목동야구장에 온 지 3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 경기가 끝이 난다. 정확하게 9회에. 야구는 한 경기가 9이닝이며 9회가 끝나고서도 동점일 때 연장전에 들어간다는 것을 홈스는 유추해 낸다. 이 사실을 혼자 알고 있으려니까 입이 근질근질하다.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친구 존 왓슨에게 전화를 한다. “네, 존 왓슨입니…” 왓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홈스는 “야구라는 스포츠를 처음 봤는데 9이닝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아 냈다”고 재빨리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왓슨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뚜뚜뚜’라는 소리만 들린다. 왓슨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야구가 처음 생겼을 때는 21점을 먼저 올리는 팀이 승리했다. 근데 그래서는 한 경기가 1, 2시간 만에 끝날 수도 있지만 온종일 하고서도 승패가 결정 나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1857년에 지금과 같은 9이닝 제도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때는 양 팀의 아웃이 같지 않으면 경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기에 홈 팀(후공을 하는 팀)이 앞선 상황에서 9회 초가 끝나도 경기는 계속됐다. 9회 말 공격이 끝날 때까지. 당연히 끝내기 안타나 홈런도 없었다. 지금과 같은 규칙이 제정된 것은 1880년이다.”

 

 

둘째 날. 야구는 3의 법칙이 지배한다

전광판에 표시되는 이닝은 12회까지다. 그렇다면 연장 13회는 어떻게 나타낼까? 이전 12회까지의 점수가 모두 지우고 1회를 13회로 2회를 14회로…12회를 24회로 간주한다. <사진: 야구라>

 

 

어제의 경험이 쌓였기 때문인지 홈스는 한층 여유롭다. 응원단장의 리드에 따라 응원가도 따라 부르고 응원 막대도 휘두른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목적을 잊은 것은 아니다. 매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필드 곳곳을 샅샅이 훑어본다. 그 가운데 깨달은 사실 하나는 야구라는 스포츠가 기본적으로 9명이 한다는 점이다. 지명타자가 있기에 10명이 하는 것 같지만 공격이나 수비나 모두 9명이다. 전광판의 1에서 9까지 숫자는 타격하는 순서, 타순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 앞에 표시된 숫자의 의미는 도통 모르겠다는 눈치다. 2에서 9까지 그리고 영문자 D가 어떤 법칙도 없이 뒤섞여서 나열되어 있기 때문. 선수 등번호도 아니고 선수 개인이 좋아하는 번호일 리도 없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직면한 나그네가 이런 느낌일 것이다. ‘분명히 어딘가에 해답을 풀 실마리가 있을 텐데…’라며 멍한 눈빛을 그라운드로 돌렸을 때 한 가지 공통된 점이 보인다. 양 팀 포수 이름 옆에 공통으로 숫자 2가 있다는 것. 또한 1루수는 3, 2루수는 4… 중견수는 8, 우익수는 9. 이름 옆의 숫자는 수비 위치를 나타낸 것이다.

 

“6-4-3 으로 이어지는 병살타.” 방송을 통해 종종 듣는 말이다. 6-4-3은 수비위치를 나타낸다. 유격수(6)가 땅볼을 잡아서 2루 베이스 커버하러 온 2루수(4)에게 공을 던져서 1루 주자를 포스아웃시키고 나서 1루수(3)에게 송구해서 타자 주자마저 아웃시키며 더블플레이를 완료한다. 

 

 

그렇다면 D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홈스는 투수(Pitcher)가 P인 것을 보면 D는 지명타자(Designated Hitter)라는 것을 유추해 낸다. 대타(Substitute Hitter)는 H, 대주자(Substitute Runner)는 R이라는 사실도.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떠나지 않는다. ‘왜 수비 위치 숫자가 2부터 시작하는 것일까?’ 야구에 대한 지식이 상당한 존 왓슨의 말을 들어 보자. “투수도 숫자로 나타내면 1이다. 단지, 투수라는 것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해 전광판에 P로 표시한 것뿐이다. 그리고 타격 순서와 수비 위치를 라인업이라고 한다.”

 

탄력이 붙은 홈스는 빠르게 전광판의 암호를 풀어 나간다. 타자 이름 앞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것은 그 타자가 지금 타석에 들어섰다는 의미이며 CH와 Ⅰ, Ⅱ, Ⅲ는 주심(umpire-in-chief)과 각 누심의 이름이라는 것도. 옆으로 가서 H, E, FC는 각각 안타(Safe Hit), 실책(Error), 야수선택(Fielder's Choice)을 가리키고 기록원이 타자의 타격 결과를 나타낸다. 그 밑의 HR, RB, AV는 지금 타석에 서 있는 타자의 홈런(Home Run), 타점(Run Batted In), 타율(Batting AVerage)을 의미한다는 것은 척하면 비디오.

 

SBO는 볼카운트와 아웃카운트를 나타낸다는 것도 알아내자마자 홈스는 만세 삼창을 한다. 전광판의 비밀을 푼 것이다. 또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야구는 9명이 9이닝을 하며 스트라이크 3개로 스트라이크 아웃이 되고 3아웃에 이닝이 끝나는 3의 법칙이 지배한다는 것을. 그런데 ‘왜 베이스온볼스는 4볼일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하나 정도는 돌연변이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자문자답한 홈스는 영국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왜 베이스온볼스만 3의 법칙과 무관한 4볼일까? 존 왓슨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871년에 스트라이크와 볼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는데 그때 베이스온볼스는 9볼이었다. 그러다가 투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볼이 하나씩 줄어들어서 1889년에 지금과 같은 4볼이 되었다. 훗날 3볼 베이스온볼스로 규칙이 바뀐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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