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 훔치기 - 투수는 포수 미트를 향해 공을 던진다. 포수가 공을 던져야 할 지점을 정확하게 정해 주면 투수로서는 제구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사인 훔치기 때문이다. 주자 있는 상황은 물론 주자 없을 때도 포수 사인과 위치를 보고 타자에게 알려 주는 행위가 빈번하다. 어쩔 수 없이 포수들은 가운데 앉아 있다가 투수가 다리를 들면 그때서야 자리를 옮기고 미트를 들어 올린다. 또 가짜 사인을 중간중간 섞거나 일부러 던지려는 공과 반대로 사인을 내기도 한다. 베테랑이나 제구력이 좋은 투수라면 상관없지만 어린 투수들은 컨트롤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상대가 사인을 훔친다는 확신이 들 때 대응 방법은 다양하다. 대놓고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경우도 있고 타자 몸쪽 바짝 붙는 볼을 요구하기도 한다. 또는 경기 도중 사인을 바꿔서 상대의 사인 훔치기를 역이용해 혼란을 주는 방법도 있다. 과거 몇몇 포수들은 아예 노 사인으로 공을 던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센스와 순발력이 뛰어난 포수들만 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다. 물론 어느 쪽이든 포수가 골치 아픈 것은 마찬가지다. 김태형 코치는 “포수들이 야구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말로 사인 훔치기 풍토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감독의 분신 - 야구는 관중석에서 볼 때와 덕아웃에서 볼 때, 그리고 실제 그라운드 안에서 선수로 뛰면서 볼 때가 다르다. 필드 바깥보다 안에 있을 때 더 잘 보이는 내용이 분명히 있다. 투수의 구위에 대한 판단이 그런 예다. 투수의 볼에 힘이 떨어지진 않았는지, 지금 컨디션이 어떤 상태인지는 덕아웃에서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 감독들은 타임을 요청하고 포수를 불러 의견을 들어 본다. 포수가 감독의 ‘아바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 많고 신뢰감을 주는 포수의 존재는 중요하다. 직접 사인을 내지 못하고 매번 벤치 쪽을 쳐다보는 포수는 투수들에게 신뢰를 받기 어렵다. 또한 포수로서 성장도 늦어진다. 벤치-포수-투수를 거치는 사인보다 포수와 투수가 직접 주고받는 사인이 더 신속하고 원활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면에서 SK 박경완은 대단한 포수다. 어느 팀의 코치는 “박경완은 감독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전권을 갖고 경기를 운영한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래서 투수들이 절대적으로 박경완을 신뢰한다. 상대팀에서 보면 감독의 지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볼 배합이 나올 때도 많다. 투 볼, 스리 볼에서도 변화구를 던지게 하니까. 그만큼 팀에서 신뢰를 주고 무게감이 있다는 얘기다.”
포수의 권한은 수비 시프트와도 연결된다. 만일 포수는 우측으로 타구가 가는 볼 배합을 하는데 수비진이 좌측으로 움직인다면? 포수가 원하는 대로 볼 배합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잘못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포수가 전권을 가진 팀은 수비 위치를 정할 때도 포수에게 상당 부분 힘을 실어 준다. 포수와 수비 코치, 전력분석팀이 사전에 미팅을 통해 어떤 전략으로 경기를 진행할 것인지, 타자에 따라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대화를 나눈다. 선수단에서 감독과 가장 자주 대화를 나누는 선수도 바로 포수다. 국내에서 포수 출신 명감독이 많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포수의 타격 - 아무리 수비가 탄탄한 포수라도 타율이 1할대라면 팀에 보탬이 되기는 어렵다. 김태형 코치는 “포수들에게 방망이에 신경 쓰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방망이가 잘 맞아야 리드도 신나서 잘되는 법이다. 두 타석 삼진당하고 들어온 포수가 수비가 제대로 되겠나.” 물론 과욕은 금물이다. 어떤 포수들은 자기 타율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마스크를 쓴 상태에서도 다음 타석을 생각한다. “포수가 그런 식이면 투수들이 먼저 알아챈다.” 김태형 코치의 말이다. “저 인간이 또 방망이 안 맞으니까 리드를 대충대충 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투수가 그런 생각을 갖고 던지는데 어떻게 타자를 이길 수 있겠나.”
희생정신 - 프로야구 선수는 누구나 자기 얼굴이 신문과 방송에 대문짝만하게 나오길 바란다. 하지만 포수는 경기의 절반 가까운 시간 동안 얼굴을 가리고 있어야 한다. 얼굴 노출로 따지면 '턱돌이'보다 특별히 유리할 게 없는 처지다. 게다가 포수는 아무리 잘해 봐야 본전이다. 못하면 온갖 욕을 혼자 다 먹지만 잘하면 그 공은 투수의 몫으로 돌아간다. 감독들도 결과가 나쁠 때는 투수 대신 포수를 질책한다. 김태형 코치는 “투수는 매우 섬세한 포지션”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투수를 꾸중하면 그 다음에 좋은 투구를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포수들은 자신이 투수 대신 욕을 먹고 비난받는 일을 기꺼이 감수한다. 야구가 생긴 이래 늘 그래 왔다.” 호투한 투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종종 “아무개 형의 리드가 좋았다”라고 말하는 건 포수의 ‘희생’에 대한 최소한의 답례다.
포수는 자신이 돋보이려고 해서는 안 되는 포지션이다. 타석에서 다른 선수들이 심판의 볼 판정에 대해 구시렁대고 비난해도 포수는 절대 그렇게 해선 안 된다. 곧바로 다음 수비에서 자기 팀 투수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포수가 지나치게 멋있는 리드를 하려고 해도 곤란하다. 자기가 생각할 땐 아무리 기가 막힌 볼 배합이라도 투수가 던질 수 없는 공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철저하게 투수의 능력에 따라 공을 유도해야 한다. 자기가 멋있게 보이려고 투수가 자신 없어 하는 공을 계속 요구하는 포수는 포수도 아니다.
경험이 필요해 - 어떤 팬들은 갓 프로에 입단한 고졸 포수의 능력에 과도한 환상을 갖는다. 몇 년 전 한 구단은 주전 포수가 빠지고 2군에 있던 포수가 올라와서 마스크를 쓴 몇 경기 동안 ‘일시적으로’ 팀 방어율이 좋아졌다. 그러자 팬들은 투수진의 부진이 기존 주전 포수의 리드가 나빴기 때문이니 투수 리드가 좋은 신인 포수를 주전으로 기용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게 과연 근거가 있는 주장일까?
“딱 7경기였다.” SK 김정준 전력분석 코치는 지난 2009년 박경완의 자리를 정상호가 대체했을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처음에는 상대 타자들이 적응하지 못했다. 생소하니까. 박경완이면 바깥쪽으로 갈 타이밍에 몸쪽 공이 들어오니까 대응이 안 됐던 거다. 하지만 몇 경기 지나고 적응이 되자 바로 난타당하기 시작했다.” 두산 김태형 코치도 “신인은 아무 것도 모르고 달려들기 때문에 처음에는 통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팀으로서는 분위기가 전환되는 것도 있고, 또 신인들은 파이팅이 좋아서 투수로서는 기운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즌은 133경기다. 한 시즌을 온전하게 버텨 내려면 아무 것도 모르는 저돌성이나 ‘생소함’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포수에게는 경험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