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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맨·어그리맨

[스크랩] '괴물신인' 양준혁에서 '레젼드' 양신까지..

by 독청64 2010.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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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벌써 프로야구가 생긴지 29년이 되었습니다..

프로야구 원년 각 팀이 선수단 구성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말 맨 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시작을 했다면..

이제는 2008 올림픽 금메달, 2009 WBC 준우승 등 세계 최고수준의 선수들과 겨루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 짧은 시간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이런 비약적인 발전에는 선수들의 땀과 노력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것이고, 또한 이러한

선수들의 노력이 각종 대기록을 만들어 냈지요..

 

현재 타자의 기록 부문에서 보면 거의 모든 통산기록은 양신으로 시작해서, 양신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한국 프로야구를 말할 때 양신을 빼놓고는 절대 논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타자의 시대적 구분과 양신의 기록을 같이 써 봅니다.. 

 

 

 

<박스 안의 기록은 매해년도 양신의 기록이고, ( ) 안의 숫자는 시즌 순위임..>

 

▶ 3할타자<수위타자>의 시대 (1982~1987)

 

 

프로야구 초창기 '3할' 이라는 타율은 강타자의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던 시기였죠..

당시 '수위타자 = 최고의 타자' 라는 것을 척도로 만든 선수들이 있었는데 바로 '4할타자'

백인천과 '안타 제조기' 장효조였습니다..

프로야구 원년 백인천이 MLB에서도 꿈의 타율이라는 4할(0.412)을 기록하며 수위타자의

자리를 오르면서 팬들을 열광시켰죠..

이듬해부터 등장한 장효조는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매해 높은 타율을 (0.369-0.324-

0.373-0.329-0.387) 기록하며 확실하게 수위타자가 최고의 타자임을 각인시켰죠..

당시는 경기수가 적어 시즌 25홈런 정도이면 홈런왕 타이틀을 딸 수 있었기에  홈런왕

타이틀보다는 수위타자의 타이틀을 더 높게 평가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3번의 홈런왕을 차지한 이만수 역시도 1984년에 수위타자(0.340)에 오른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최고타자의 필수요건은 수위 타자였습니다..

 

 

 

 

▶ 홀로 반짝 빛났던 홈런왕 시대 (1988~1993)

 

  1988년 김성한이 최초로 30홈런을 달성했지만, 그렇게

  크게 어필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 단순히 경기수 증가에 따른 홈런수 증가로 보는

  시각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1992년 장종훈이 단숨에 홈런 41개를 때려내면서

  새로운 타격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이후 장종훈의 성적이 주춤하면서 결국 1년

  반짝했던 40홈런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그후 장종훈은 많은 홈런을 때려내고 연습생 신화를

  만들었지만, 결국 자신의 세운 41홈런 기록을 넘는 것은

  실패합니다..

 

 

 

 

1993년은 양신이 삼성에 입단한 해입니다..

1991년 삼성은 당시 절실했던 투수력을 보강하기 위해 1차지명에서 김태한을 선택했고..

이후 양신은 쌍방울의 2차지명을 받았지만, 상무로 바로 입대한 후 다시 삼성의

1차지명을 받아 1993년 입단합니다..

데뷔 하자마자 타율,출루율,장타율 1위에 홈런과 타점은 팀선배인 김성래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면서 신인왕을 거머쥐죠..

두산프런트에서 백지수표(실제로는 수표가 아니라 백지를 주고 그냥 요구 조건 다

쓰라고 했다죠^^) 를 주면서 까지 데려오려 했던 양신은 확실한 대형 타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당시 '2년차 징크스'라는 것이 상당히 유행이었죠) 93년보다는

낮은 스탯이지만 무난한 2년차 성적을 기록합니다..

이 시기 양신은 3할-20홈런-90타점이라는 전통적인 강타자의 스탯을 보여준

시기였습니다.. 

 

 

 

 

▶ 호타준족의 시대 (1994~1997)

 

 

호타준족의 서막을 연 것은 이종범이었습니다..

1994년 아쉽게 20홈런을 치지는 못했지만, 19홈런 84도루 타율 0.393을 기록하며 홈런

타자는 발이 느리다는 편견을 깨트리며 새로운 타자의 모델을 제시했지요..

이러한 호타준족의 전성기는 바로 '30-30의 사나이' 박재홍의 등장부터입니다..

박재홍은 데뷔해인 1996년 30홈런-30도루를 기록하며 최고의 호타준족으로 떠올랐고,

이후에도 두번의 같은 기록을 더 남기게 됩니다..

1996년은 가히 호타준족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해 20-20 클럽에 가입한 선수가

무려 5명이나 됐습니다..(박재홍-이종범-양준혁-최익성-홍현우)

 

 

 

워낙 꾸준히 잘했기에 특별한 전성기가 없는 양신이라지만, 굳이 전성기를 꼽자면

바로 이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팀이 리빌딩에 들어가면서 94~96까지 포스트 시즌을 진출하지 못하면서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못받았다는 것이 좀 아쉽습니다..

거구이면서 나름 어느정도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던 양신도 시대에 흐름에 맞게

도루에 욕심을 내며 뛰기 시작합니다..

확실히 95년과 그 이후의 기록을 보면 도루의 갯수가 차이가 납니다^^

이 기간동안 매년 이종범,박재홍,김기태,우즈,이승엽등이 돌아가면서 걸출한 기록을

남겼지만, 이 기간 전체를 본다면 가장 빼어난 타자는 단연 양신의 몫이었습니다..

 

 

 

 

▶ 홈런왕의 전성 시대 (1998~2003)

 

 

1998년부터 국내에 도입한 용병제도로 국내 야구계는 또 한번의 큰 지각변동을 갖게

되는데, 타이론 우즈는 국내에 등장하자마자 42홈런을 때리며 기존의 장종훈이 보유

하고 있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갈아 치우게 됩니다..

이 해 우즈는 마지막까지 이승엽과 치열한 접전 끝에 홈런왕을 차지하며, 동시에

시즌 MVP도 수상하게 되죠..

가장 화끈했던 해는 1999년으로 이해 30홈런 이상의 타자가 13명이나 나왔습니다..

40홈런 이상의 타자도 4명이나 되었으니, 어지간히 홈런 쳐서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같은해 이승엽은 54개의 홈런으로 단숨에 50개의 고지를 돌파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홈런왕 시대도 이승엽이 아시아 신기록인 56개의 홈런을 치고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곧바로 식어 버렸고, 또한 용병들 역시도 점점 투수를 뽑는 추세로 바뀜에

따라 힘 있는 용병타자들도 시원한 홈런포도 찾아보기 힘들게 됐죠..

 

 

 

양신에게 있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파란 유니폼을 입었건만, 1999년에 임창용 투수와 3:1 트레이드 되며

고향팀을 떠나야만 했죠..

그리고 선수협 파동을 격으며 2000년에는 해태에서 엘지로 다시 한번 이적을 하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타격 부문의 순위가 모두 내려갔지만, 이 시기는 워낙 용병 타자들이

득세하던 시기라서 그렇지 국내 타자로만 본다면 여전히 탑레벨을 성적을 유지하던

시기였습니다..

엘지로 이적해서는 홈런의 갯수는 줄었지만, 2001년에는 생애 4번째 수위타자에

오르며 여전한 타격 솜씨를 뽑냈습니다..

 

 

 

자신을 버린 삼성이 미워 다시는 쳐다 보지도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대구구장을

찾을 때마다 양신을 연호하는 고향팬들의 환호성에 차츰 얼어 붙었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들던 차에 2002년 다시 삼성에 복귀하게 됩니다..

2002년 삼성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자리에 함께 했지만, 양신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한 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듬해 다시 '만세타법'이라는 새로운 타격폼으로 부활을 알리며 타격

전 부문에 걸쳐 상위에 오릅니다..

양신도 이 당시에는 홈런에 욕심을 내며 본인의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2003년은 이승엽-마해영-양준혁이라는 역대 최강의 클린업트리오가 나온 시기

이기도 합니다..

 

 

 

 

▶ 높은 득점 창출력(RC) 타자들의 시대

 

 

근래 들어 타자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이터들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OPS부터 추신수를 볼 때마다 떠올리는 5툴, 그리고 각종 세이버

매트릭스의 기록들까지..

너무 많아서 간혹 어떤 것으로 타자를 평가해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라는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점점 개인 기록보다는 팀공헌도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평가 받게 되었다는 점이죠.. 

이 시기에 가장 뛰어난 타자는 누가 뭐래도 올해로 개인의 2번째 트리플 크라운이

유력한 이대호 선수일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장타력이 줄어들었지만, 양신 나름대로 팀의 승리에 기여하려

노력했던 부분이 바로 출루율 부분입니다..

양신이 마지막까지도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만의 최고 장점인 

'신의 선구안' 때문이라고들 하죠..

기록을 보면 과거에 비해 장타율은 많이 줄었지만, 출루율은 오히려 더 좋아졌습니다..

이 시기 중 양신 개인에게 가장 기억에 남을 해는 2007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첫 2000안타의 기록을 달성하고, 39세의 나이로 다시 한번 GG의

수상을 한 해였습니다..(현재까지 역대 최고령 GG^^)

반면 아쉬움도 같이 남는 해였는데 타율은 이현곤에 비해 1리가 모자라서, 출루율은

김동주에 비해 1리가 모자라서 두 부문 모두 아쉽게 2위로 만족해야 했던 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활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부상 전까지만 해도 삼성의 공격진을 이끌며 여전히 좋은 활약을 보여줬죠..

만일 부상만 없었다면 우리는 41세 GG 선수를 봤을지도 모를 일이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좋은 타자에 대한 기준과 척도도 조금씩 변화합니다..

양신의 기록을 보면, 양신 본인이 그 기준과 척도를 세워 나갔다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렇지만 각 시대가 요구하는 흐름에 맞게 양신 본인도 거기에 맞추어 나가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선수였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타격 기술의 발전 만큼이나 투수들의 기량도 나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죠..

1990년대 초반 140Km만 던져도 우리는 그 투수들에게 강속구 투수라 불렀고, 변화구라야

커브와 슬라이더가 거의 전부이던 시절에 양신은 3할의 타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2000년대 150Km 육박해야지만 강속구 투수라 부르며, 투수들이 각종

변화구 (포크볼,체인지업,컷패스트볼,스플리터)를 던지는 때에도 양신은 3할의 타자

였습니다..

이러한 양신의 꾸준한 기록들은 단순히 선수의 타고난 재능과 기량만으로는 이루어

내기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결국 지금의 '레젼드 양신'은 그가 후배에게 말하는 최고에 대한 열정과 그리고 항상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만들어 낸 것이겠죠..

 

  

 

 

출처 : 프로야구 토론방
글쓴이 : 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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