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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계속된다

<스크랩> “야신보다 어떤 순간도 안놓치는 ‘잠자리 눈깔’ 별명이 좋아”

by 독청64 2012.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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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만남]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

열렬 야구팬으로 ‘야신’을 ‘영접’했다. 철두철미 훈련과 승리를 중시하는 사내, 6번 프로야구 감독을 맡고 6번 경질된 뒤에도 꼿꼿하게 독립야구단의 감독을 맡고 있는 사내를 4월11일 고양시 야구국가대표훈련장에서 만났다. 일흔의 나이에 불타협, 불퇴전의 정신과 딴딴한 육체를 가진 그가 놀라웠다. 세상과 야구판의 이치를 냉정하게 인식하고 자기의 길을 가는 그에게서, 나이가 들어도 끄떡없고 오히려 빛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느낌을 받았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트위터@patriamea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왼쪽)이 지난 11일 경기도 고양시 야구국가대표훈련장에서 조국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에게 야구방망이를 건넨 뒤 한 수 지도하고 있다. 고양/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응룡 감독이 붙여준 별명 ‘야신’보다 ‘잠자리 눈깔’을 선호하는 것으로 압니다.

‘잠자리 눈깔’은 태평양 감독 시절 별명인데 어떤 순간도 놓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별명이 더 맘에 듭니다. 사실 그때(야신이라는 별명이 생긴 2002년 한국시리즈 때) 내가 선택한 수가 거의 다 맞았어요, 투수 교체, 대타 등…. 그러나 ‘야구의 신’은 있을 수 없어요. 모자라도 한없이 모자라죠. 사실 김응룡 감독, 머리가 좋은 거죠, 나를 ‘야신’이라고 치켜세워 놓고 ‘야신’을 이겼으니까.(웃음)”


-수첩, 식당, 동행인 등과 관련하여 많은 징크스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징크스가 유난히 많아요. 덜 알려진 것으로 화장실 징크스도 있고.(웃음) 예를 들어 사직구장 가면 왼쪽에서 세 번째 화장실을 갑니다. 잠실구장은 왼쪽에서 첫 번째 화장실이고, 문학구장에서는 감독실에서 나오자마자 화장실 갑니다. 징크스는 이기고 싶은 집념의 산물입니다. 마음의 불안감을 이기기 위함이기도 하고요, 좋게 얘기하면 세심한 것이고….”


-‘전쟁’을 앞둔 ‘장수’가 행하는 ‘주술의식’이군요. 김 감독은 경기운영에서 데이터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데이터는 참고자료일 뿐이죠. 실제로는 직감이 더 많이 작동합니다. 90%가 직감이죠. 데이터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최형우가 김광현한테 몇 타수 몇 안타 쳤는지는 기록이 있지만, 경기 당일 (그 선수를 기용할지 안 할지)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직감은 수많은 경험과 관찰의 농축물이겠지요. 현재 쓰고 있는 야구모자 챙 안쪽에 적어둔 글귀가 있는지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곳에다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적어둔 것일 텐데….

“‘판단’, ‘결단’ 이런 걸 많이 써놓습니다. ‘집념’이라고 쓴 것도 있죠.”

난 ‘야구의 신’에 한없이 모자라
승리 집념 커 ‘화장실 징크스’도
데이터 중시해도 참고자료일뿐
실제론 경기운영 90% 직감 의존



-고교 입학 때부터 야구에 죽고 야구에 사는 ‘야생야사’(野生野死)를 추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시즌 중엔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고교 진학하면서 돈 벌고 학비 내야 하니까, 그때 생각이 깊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1년에 일주일 집에 들어가면 많이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도 아파트 얻어 혼자 나와 삽니다. 에스케이(SK) 5년 동안 집에 들어간 날이 한 달도 안 됩니다.”


-쫓아내지 않는 사모님께 감사해야겠습니다.(웃음) 여가 시간에 뭘 하시나요?

“여가 시간 없습니다.(웃음) 오늘도 쉬는 날인데 선수들 보러 왔어요. 에스케이 시절에도 시간 나면 2군 선수들 보러 가곤 했습니다. 24시간 내내 안테나를 세워놓아야 합니다. 프로는 완전을 추구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꿈속에서도 야구를 합니까?

“야구 꿈을 자주 꿉니다. 두산한테 진 날 야구 꿈을 꾸다가 새벽 4시에 벌떡 일어나 어떻게 하면 이길까 생각했죠. ‘야구의 신’이라면 모든 걸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왜 새벽 4시에 일어나 끙끙대겠습니까?(웃음)”


-자서전 제목인 ‘꼴찌를 일등으로’에 담긴 원칙은 무엇입니까?

‘어차피’, ‘혹시’, ‘반드시’ 이 세 단어를 어디에 적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차피’는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혹시’는 1~2%의 희망을 쫓는 것이구요. 

나는 ‘어차피’, ‘혹시’를 ‘반드시’로 바꾸려고 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걸 계발하는 게 나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패자부활전’ 없는 한국 사회에 대해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나라는 재벌사회, 금권지배사회 아닌가요? 돈 있는 사람이 말하면 통하고, 돈 없는 사람이 말하면 통하지 않는 사회죠. 그리고 혹시나 피해볼까봐 말도 잘 못하는 나라죠. 굉장히 슬픕니다.”



-박현준, 김성현 선수의 경기조작 사건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두 선수가 돈이 무엇인지 몰랐던 게 아닌가 싶어요. 정당하게 벌지 않은 돈은 사람을 망치는 법인데…, 너무 슬픕니다. 1958년 한국에 처음 온 이후 신문에 하루라도 부정부패 기사가 안 나오는 날이 없습니다. 잔재주 부리는 놈이 이기는 사회는 바뀌어야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들 눈은 파닥파닥 살아 있는데, 이 아이들이 살아야 하는 사회는 변함이 없어요. 돈, 돈, 돈타령만 합니다.”


-사실 저는 고 최동원 선수 시절부터 ‘거인’의 열혈팬입니다. 아드님 김정준씨의 책에 따르면 김 감독은 “거인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있었다는데…,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 경쟁심을 느끼는 것 같다는 아드님의 관찰이 있더군요.

“(아들 책) 안 읽어봤어요.(웃음) 2008년 시즌 전 미디어데이 때 롯데 정수근의 ‘연습만 하는 팀한테는 지기 싫다’는 말이 발단이 됐습니다. 로이스터에게 한국 야구가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본 가서도, 아시아시리즈 가서도 마찬가지구요.”


-야구인 사이에선 김 감독에 대한 호불호가 갈립니다. ‘재미있는 야구’를 하지 않고 악착같이 ‘이기는 야구’만 한다는 비난이 있는데….

“(목소리를 높이며) ‘재미있는 야구’ 한 감독 중 남은 사람 없습니다. 승부가 무서운 걸 모르는 것이죠. 예를 들어봅시다. 8-0으로 이길 때는 8-0으로 끝내야 합니다. 점수를 내주어 8-7로 이기면 투수를 많이 써야 합니다. 전력 소모 없이 이겨야죠. 1승, 1승 잡고 올라가야 하는데, 경기를 놓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4~5점 리드할 때 시합이 가장 힘듭니다. 표현이 뭣하지만 ‘확인사살’이라도 해서 상대팀을 두렵게 만들어야 합니다. 확실하게, 확고하게 이겨야 하는 거죠. 지고 있을 때는 악착같이 쫓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전력을 소모시켜야 합니다.


-야구를 목숨을 건 ‘전쟁’으로 보는 ‘전사’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근래는 김 감독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생각이 바뀐 것 같더군요.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면서도 이기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자율야구’가 아마추어 야구까지 판을 쳤습니다. 한국 야구 망하겠다 싶었어요. 쌍방울 레이더스 가서 혹독히 연습시켰습니다. 그 전해까지 엘지(LG) 트윈스와 5승14패였는데, 내가 간 뒤 14승5패로 바꿔 놓았습니다. 연습량이 많고 노력하면 변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줬습니다. 당시 나는 ‘천 원짜리 야구’라는 말을 썼어요. ‘천 원’밖에 없으면서 (‘만 원짜리 야구 하는’) 호화멤버 해태나 두산을 어떻게 이기느냐, 기용 방법과 전략전술이 달라져야 한다는 거죠. 팬은 물론, 야구해설자도 이해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욕하던 사람들이 바뀌더군요. 요즘 엘지 김기태 감독의 야구를 잘 보세요. 선발이 없어요, 쌍방울 야구죠.”


우승여행·선수 치료비 등 갈등
SK, 2007년부터 경질 움직임
한국선 돈 없는 사람 말은 안통해
피해 볼까 말도 못하는 나라 슬퍼


-프로야구 6번 감독 맡아 6번 경질됐습니다. 에스케이에서 경질됐을 때 ‘졸부’에 맞서는 ‘장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인 팬이지만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우승이 필요하니 김 감독을 잡았고, 우승하고 나니 김 감독이 부담이 된 것 아니었나요?

구단에서 처음에는 나를 좋아했어요. 돈도 많이 안 쓰고 승리를 하니. 나는 자유계약선수(FA) 한명도 안 잡았어요. 자유계약선수 한명 데리고 오려면 40억, 50억 듭니다. 어디서 잘린 선수, 2군 선수를 데리고 와서 좋은 선수로 만들어 놨습니다. 한계에 달한 김재현도 4년 연장시켰고, 박경완은 아직도 뜁니다. 돈으로 한 것은 없어요. 약한 전력으로 이겼습니다.”


-그런데 왜 틀어졌나요?

구단 사장에게는 출세가 우선입니다. 돈 안 쓰고 성적 올리면 성과는 자기 것이 됩니다. 

선수들이 고생해서 만든 것인데…. 

승부의 세계에서 어려운 것은 정상에 오르는 것,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정상을 유지하는 것, 

가장 어려운 것은 정상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입니다. 

에스케이에서 나와 선수들은 힘을 합쳐 세 가지 어려운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사장은 재미없는 야구를 했다고 싫어했습니다. 처음 하는 얘기인데, 우승 후 선수단에 200만원씩 상품권을 줬습니다. 우승여행을 가족 놔두고 선수만 가라는 건가, 그러니 선수들이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선수단 모두가 인격적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습니다. 나도 열을 받았구요. 그리고 선수들 치료비를 사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내가 결재했습니다. 정대현, 이호준 등 일본에 보내 치료하는 비용으로 총 1억원 정도 썼을 겁니다. 사장이 싫어했나 보더군요. 사실 2007년과 2008년 우승 한 뒤 간부회의에서 나를 자르려고 했습니다. 높은 곳에 있으면 바람이 많은 법 아닌가 싶습니다.”


-부자 구단 에스케이 와이번스 이전에 가난한 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감독을 했습니다.

“처음 시작은 똑같습니다. ‘왜 계약했지? 잘못했다’로 시작합니다.(웃음) 레이더스는 선수가 없었고, 키운 아이들도 분발하지 않았습니다. 구단 지원은 생각하지도 않았구요. 다른 팀에서 200억 쓸 때 쌍방울에선 50억 가지고 했어요. 무궁화 5개 호텔에서 잘 때 우리는 앞방 옆방 소리 다 들리는 곳에서 잤습니다. 팀 구성원 모두가 결핍과 싸우며 운동을 했어요. 그러나 불만이 없었습니다.

당시 현대가 선망의 부자 구단이었어요. 현대와의 경기에서는 내가 일부러 심판과 거칠게 싸웠어요. 현대와의 경기에서 제일 많이 퇴장당했고요. 선수들이 부자 구단에 기죽지 말라고 의도적으로 싸운 거죠. 그 결과, 현대와 쌍방울의 선수의 급 차이는 매우 컸는데 승패 차이는 별로 없었어요. 감독으로 깨침이 있었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습니다. 없는 ‘살림’으로 경기를 치러야 하니까 상대가 보이더라구요.”


원더스 선수들 성취 이뤄내면
프로야구 시스템 바뀌는 계기
‘패자부활’ 하는 모습 보여주면
세상 사람들에게도 희망될 것


-선수의 기를 살리려는 의도적 행동이었군요. 새로 맡은 고양 원더스를 어떻게 키우려 하십니까?

프로야구에 대한 자극제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잘 해내면 프로야구의 시스템이나 관성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겁니다. 우리 선수들은 패자부활전에 들어온 선수들입니다. 이런 선수들이 잘 해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던지고 싶어요. 고양 원더스가 성취를 이루어야 제2, 제3의 독립구단이 생기고, 좀 떨어지는 야구선수들이 뛸 수 있는 공간도 생깁니다. 1년에 100명, 200명 살릴 수 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바지를 일본의 롯데 머린스에 있으면서 입기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그 이전에는 자신도 입지 않았고 선수들에게 입지 말라고 했다던데….

“오늘 아침에도 입고 나왔어요. 정장을 입어야 상식이고 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청바지를 입어보니 편하더라구요. 특히 생각이 젊어지더라구요. 양복은 무지 답답하고 늙어 보입니다. 지금은 어디 가나 청바지 입습니다. 20벌 이상 있어요.”


-저도 강의 없는 날에는 청바지를 입고 다닙니다. 그 이유가 같습니다. 서울대 교수라며 ‘무게’를 잡기 싫어서입니다. 최근 박재동 화백, 이창동 감독(전 문화부 장관)을 만났는데 두 분 다 청바지를 입고 있더라구요. 일흔 나이에 청바지 입을 수 있으려면 몸매도 유지돼야 하는데(웃음), 평소 운동을 많이 하십니까?


“건강해야 청바지도 입을 수 있죠. 배 나온 사람이 청바지 입으면 볼품이 없습니다. 최근에는 몸에 딱 붙는 청바지가 좋더라구요.(웃음) 매일 아침 30~40분 걸어서 출근합니다. 출근하면 바로 아령 운동을 합니다. 뛰고 달리는 건 안 되지만, 노크볼은 칩니다. 한번에 2000~3000개 치기도 합니다. 감독이 시범을 보일 수 있는 체력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분야건 체력이 없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어요.”


-술자리 등에서 노래를 부르시는지요? 애창곡은 뭔가요?

“술은 가끔 마십니다. 과거 20대 때 친구들 노래하고 춤출 때 나는 술만 마시고 앉아 있었습니다. 애창곡이라 하면 옛날에는 한명숙의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 최희준의 ‘하숙생’이었습니다. 지금은 안 부릅니다.”

-음치 또는 박치인가요?(웃음)

“장훈 선수 알죠? 내 1년 선배인데, 1991년 부산에서 제1회 한일 슈퍼게임을 했어요. 술집에서 장 선배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장 선배가 ‘다시는 노래하지 마라’고 하더라구요.(웃음) 그 정도 실력입니다.”

조국 교수


-개인적 소망은 뭔가요?

“없습니다. 야구 감독으로 더 출세하고 싶다, 돈 많이 받고 싶다 등의 마음이 없습니다. 우직하고 순수하게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어 어떻게 상대를 이길까 오직 그것만 소망합니다.”


-30대의 김성근과 70대의 김성근을 비교한다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생각이 깊어졌다고 봅니다. 30대는 감정이 앞섰지 않나 싶어요. 자기만족 속에서 움직였어요. 지금은 내 감정보다는 상황을 고려하며 내 감정을 죽입니다. 옛날에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면 만족했지만, 지금은 효과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걸 생각합니다.”


-김 감독이 생각하는 야구와 인생의 공통점은 뭔가요?

가면 갈수록 어렵다는 것, 잡히지 않는다는 것, 매 이닝 알 수가 없다는 것. 인생도 됐다 싶은데 되지 않고 영원히 종착점이 없는 거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고 갈 데까지 가 보는 게 야구고 인생이 아닐까 합니다.” 정리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김성근 감독은

“야구감독 하면서 3번 울었다”

김성근 감독
1942년 12월13일 일본 교토에서 3남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1959년 일본동포 학생야구단으로 처음 고국을 방문했고, 이듬해 영구 귀국했다. 국가대표와 기업은행 좌완 에이스로 활약하다가 어깨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1969년 마산상고(현 용마고) 사령탑을 시작으로 40년 넘게 지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야구감독 하면서 세번 울었다”고 했다. 1977년 충암고 감독 시절 신일고와의 황금사자기 8강전, 엘지 감독대행이던 2002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 그리고 에스케이 감독이던 2009년 기아와의 한국시리즈 7차전이다. 모두 끝내기 홈런을 맞고 역전패했다. 프로 통산 1234승 57무 1036패. 김응룡 감독(1436승 65무 1125패)에 이어 역대 2위다. 김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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